칠곡 녹봉 정사지[ 漆谷鹿峰精舍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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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2회 작성일 22-05-12 07:26본문
칠곡 녹봉 정사지[ 漆谷鹿峰精舍址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로3길 77-60[창평리 368]
시대 조선/조선 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4월 18일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85호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강학소 터.
개설
녹봉 정사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을 연구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녹봉사(鹿峰寺) 터에 세운 강학소이다.
변천
원래 녹봉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사적(寺籍)을 보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숭유 배불(崇儒排佛) 정책에 의해 녹봉사는 폐허가 되어 내려오다가, 1561년(명종 16)에 성주 목사 황준량, 교수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중심이 되어 고을 사람들과 함께 녹봉사를 개축하고, 몇 채를 새로 지어 녹봉 정사를 세웠다.
건물로는 성정당(誠正堂)·시습재(時習齋)·양정헌(養正軒)·양호루(養浩樓)·관물대(觀物臺)·천연지(天淵池) 등이 있었는데 모두 이황이 이름을 짓고, 손수 쓴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 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녹봉 정사 건립 후에도 스님 한 분이 조그마한 승사(僧舍)를 마련하여, 찾아오는 손님이나 유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인 오건이 직접 훈도를 담당하고, 이황의 제자인 황준량이 지도 감독하여 녹봉 정사를 운영하였다. 이후 성쇠를 거듭하여 19세기 초에 다시 전면적인 중수가 이루어졌고 강학소의 기능을 다시 회복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산 약 18만 5000㎡의 세부 측량으로 이상호(李相虎) 외 10명이 연명으로 녹봉 정사 소유 재산의 등기를 완료하였다. 1983년 녹봉 정사 영모계에서 주관하여 모은 성금으로 보수 공사를 하였다.
현황
녹봉 정사와 관련한 건물은 2009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붕괴되어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역사적, 학문적으로 유서 깊은 녹봉 정사를 복원하기 위하여 2011년 4월 18일 칠곡 녹봉 정사지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85호로 지정됨에 따라 4억 5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 받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정 면적은 2,557㎡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녹봉 정사는 성주와 칠곡 지역의 학문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여 성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남부 지역 성리학 강학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칠곡 녹봉 정사지는 후일 ‘강안학파(江岸學派)’라고도 불리는 퇴계학과 남명학 양자를 계승한 새로운 성리학의 한 조류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산실로서의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국역 칠곡지(漆谷誌)』(칠곡 문화원, 2009)
칠곡 녹봉 정사지 안내판
칠곡군청(http://www.chilgok.go.kr)
[네이버 지식백과] 칠곡 녹봉 정사지 [漆谷鹿峰精舍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로3길 77-60[창평리 368]
시대 조선/조선 전기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4월 18일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85호
정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강학소 터.
개설
녹봉 정사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이 스승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가르침을 받들어 학문을 연구하고 풍속을 바로 잡는 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녹봉사(鹿峰寺) 터에 세운 강학소이다.
변천
원래 녹봉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사적(寺籍)을 보관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규모가 방대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숭유 배불(崇儒排佛) 정책에 의해 녹봉사는 폐허가 되어 내려오다가, 1561년(명종 16)에 성주 목사 황준량, 교수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중심이 되어 고을 사람들과 함께 녹봉사를 개축하고, 몇 채를 새로 지어 녹봉 정사를 세웠다.
건물로는 성정당(誠正堂)·시습재(時習齋)·양정헌(養正軒)·양호루(養浩樓)·관물대(觀物臺)·천연지(天淵池) 등이 있었는데 모두 이황이 이름을 짓고, 손수 쓴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 때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녹봉 정사 건립 후에도 스님 한 분이 조그마한 승사(僧舍)를 마련하여, 찾아오는 손님이나 유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고 한다.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인 오건이 직접 훈도를 담당하고, 이황의 제자인 황준량이 지도 감독하여 녹봉 정사를 운영하였다. 이후 성쇠를 거듭하여 19세기 초에 다시 전면적인 중수가 이루어졌고 강학소의 기능을 다시 회복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산 약 18만 5000㎡의 세부 측량으로 이상호(李相虎) 외 10명이 연명으로 녹봉 정사 소유 재산의 등기를 완료하였다. 1983년 녹봉 정사 영모계에서 주관하여 모은 성금으로 보수 공사를 하였다.
현황
녹봉 정사와 관련한 건물은 2009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붕괴되어 그 터만 남게 되었다. 역사적, 학문적으로 유서 깊은 녹봉 정사를 복원하기 위하여 2011년 4월 18일 칠곡 녹봉 정사지가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585호로 지정됨에 따라 4억 5000만 원의 예산을 지원 받아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지정 면적은 2,557㎡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녹봉 정사는 성주와 칠곡 지역의 학문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여 성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남부 지역 성리학 강학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칠곡 녹봉 정사지는 후일 ‘강안학파(江岸學派)’라고도 불리는 퇴계학과 남명학 양자를 계승한 새로운 성리학의 한 조류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산실로서의 의미가 크다.
참고문헌
『국역 칠곡지(漆谷誌)』(칠곡 문화원, 2009)
칠곡 녹봉 정사지 안내판
칠곡군청(http://www.chilgok.go.kr)
[네이버 지식백과] 칠곡 녹봉 정사지 [漆谷鹿峰精舍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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